처음으로 롤플레이를 해봤을 때는 그저 ‘어떻게 하면 더 흥미로운 상황이 될까’라는 호기심에서 시작했지, 진짜로 몰입하게 될 줄은 몰랐다.
내가 원했던 건 단순히 말로만 꾸며내는 게 아니라, 실제로 몸과 마음이 뒤얽히는 어떤 감정의 끈을 잡는 거였던 것 같아.
그날은 오랜만에 혼자서 시간을 보내던 날이었고, 집 안은 조용하고 햇빛이 천천히 침대 위를 스쳐갔다. 아침엔 어딘가 부담스러운 기분이 있었는데, 그걸 어떻게 풀어야 할지 고민하다가, 갑자기 ‘어쩌면 지금 이 순간, 내가 무언가를 해볼 수 있지 않겠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건 바로 ‘조직범죄단의 지하감옥’이라는 설정으로 시작됐다.
솔직히 처음엔 웃기기도 했다. 마치 학교 미술 수업에서 만든 배경을 벗어나지 못한 듯한 느낌이었고, 나는 자신 있게 ‘수사관’이라고 외쳤다. 하지만 쓰레기통에 던져진 옷장 속에 있던 반바지를 꺼내 입고, 방 한쪽에 비틀린 의자를 놓고 앉아 “너는 이제 내 손안에 있다”고 말할 때쯤부터, 어느새 현실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설정은 그렇게 전개됐다. 내가 조직의 정보를 빼내려는 검찰 수사관이고, 상대는 도망치지 못하게 고문당하는 용의자. 그러나 그때까지는 그냥 말로만 나누던 대화였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 말들이 점점 더 무거워지고, 오히려 내가 더 빠져들기 시작했다.
상대가 손목을 묶고 있는 실을 살짝 당기더니, 조용히 말했다. “알고 계셨어요? 제 동생은 17살 때 강간 피해를 입었고, 그때 저도 보고 있었다… 그 사람들이 다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그 말을 듣자마자 내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 그 순간, ‘나는 여기서 일종의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내가 ‘수사관’이라는 역할을 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의 고통을 알아주고 싶다는 욕구를 그대로 밀어붙이는 사람일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 이후로는 더 이상 ‘플레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그에게 질문을 던졌고, 그는 눈을 감고 대답했다. 그리고 나는 그의 목소리 하나하나에 귀를 기울이며, 그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가끔은 내 목소리가 조금 떨리는 걸 느꼈다. 마치 내가 정작 그가 되어버린 것처럼.
물론 그건 너무 깊게 몰입한 탓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그 다음날 아침, 아침밥을 먹으며도 ‘내가 그날 그곳에 있었다’는 착각이 계속됐다. 머릿속에선 그의 고통이 여전히 반복되고, 나는 그에게 다시 질문을 던지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런데 그런 경험을 하고 나서야 알았지만, 롤플레이가 단지 ‘몸을 주는 것’이나 ‘감정을 조작하는 것’이 아니란 걸.
정말 중요한 건, 그 역할이 네 안에 얼마나 깊이 스며들었는지, 너 스스로가 그 상황 속에서 ‘자신을 어떻게 보는가’에 달렸다는 걸.
나는 그 후에도 여러 번 롤플레이를 시도해봤지만, 그만큼 ‘깊이’를 느끼진 못했다. 그래서 최근엔 좀 더 구체적인 플레이를 찾아보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우연히 ‘SM톡’이라는 앱을 알게 됐다.
오픈채팅 같은 곳보다는 사전에 프로필을 잘 읽고, 경험이 많거나 성향이 비슷한 사람들을 찾아서 대화를 나누는 게 훨씬 자연스럽고 안전했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중에서도 내가 정말 마음에 들어서 몇 차례 소통한 사람이 있었던 것 같아.
그 사람과는 ‘병원 긴급실’이라는 설정으로 처음 이야기를 나눴는데, 나는 ‘응급처치를 받는 환자’였고, 그는 ‘담당 의사’였다.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복부에 통증이 느껴지는 상황이었고, 나는 고통 속에서 혼란스럽게 말을 했고, 그는 차분히 나를 안정시키려 노력했다.
그렇게 두 번 정도 대화를 나눈 후, 갑자기 “너 진짜 그 자리에 있어 보여”라며 말했고, 그 말을 듣자마자 나도 모르게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왜냐하면, 그 말이 단순한 칭찬이 아니라, ‘네가 진짜 그 상황을 겪고 있는 것 같다’는 인정 같았거든.
그때야말로 내가 처음 롤플레이를 시작할 때 느꼈던 그 감정을 다시 맞닥뜨렸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내가 진짜로 ‘그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내 존재를 인정해주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게 바로 롤플레이의 진짜 매력이라는 걸 알게 됐다.
결국 지금도 나는 그 감정을 기억한다.
아침 햇살이 침대 위를 스쳐가는 그 순간, 나는 그저 누군가의 고통을 이해하고 싶었고, 동시에 그 고통 속에서 나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었던 거야.
그게 바로 내가 처음 롤플레이를 시도했을 때, 가장 깊이 남은 감정이었고, 아직도 잊을 수 없는 순간이다.